눈발이 거세다. 칼끝 너머로 놈의 살기 어린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다. 놈이 느끼는 나의 눈빛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왼쪽 발목이 다시 아파온다. 통증은 긴장이 풀어질 때 다시 찾아온다. 이래선 안된다. 죽을 수도 있다. 죽어선 안된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내 칼끝 너머로 놈의 눈빛을 노린다. 굳은 표정 뒤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놈이 보고 있는 나의 표정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 그러나 바다는 막혀있다. 조선 수군의 우두머리는 귀신과 같았다. 항상 몇 갑절이 넘는 왜군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혔다.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왜군들은 진지에서 몇 년째 농성만을 벌일 뿐이었다. 바다에 있어야 할 우리는 육지에 있었고, 육지에 있어야 할 놈들은 바다에 있었다. 이상한 전쟁이었다.

 

놈이 오른쪽으로 한 자 움직인다. 왼쪽 손목을 노릴 심산인가. 놈은 나의 왼쪽 발목이 성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머리를 치려면 왼쪽 발목으로 몸을 밀어내야 한다. 발목을 다친 나는 놈의 머리를 칠 수 없다. 손목 또는 허리 뿐이다. 놈도 나의 머리를 노리지 않을 것이다. 놈은 내가 놈의 손목과 허리만을 노린다는 사실을 안다. 머리를 치기 위해 칼을 쳐드는 순간 내 칼이 놈의 허리를 벨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놈의 손목을 노린다. 놈 역시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고립된 왜군은 조선의 도공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애초에 전쟁의 목적은 없었다. 전쟁이 전쟁의 목적이었다. 목적 없는 왜군은 돈벌이를 찾았다. 왜군 병사가 가장 귀히 여긴 것은 마을의 여자도, 조선군의 귀도 아니었다. 하얀 도자기였다. 조선의 도자기는 아름다웠다. 본토에서 온 상인들은 농민의 밥그릇도 비싼 값에 사가곤 했다. 도공을 산 채로 넘길 경우 그 값은 비교할 수 없었다. 조장 역시 도공을 찾는 데에 혈안이었다. 장군이 수색 작전을 맡겨 진지 밖으로 내보내면, 가까운 조선인 마을을 이잡듯이 뒤졌다. 도공을 찾진 못하더라도, 흰 자기 몇 개는 건질 수 있었다. 짭짤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운이 없었다. 여인 하나를 간하고 있는데 남편이 낫으로 내 발목을 찍었다. 시간 내에 진지로 돌아가야 했다. 조장은 나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혼자 힘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눈 발이 더 거세진다. 놈도 왠일인지 혼자다. 왜군이든 조선군이든 병사가 홀로 돌아다니는 일은 없다. 놈도 역시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놈의 칼끝이 두 치 정도 내려간다. 왼팔 하박에 힘이 들어간 게다. 놈이 노릴 곳은 정해졌다. 이제 알맞은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발목 때문에 섣불리 먼저 공격했다간 되레 당할 게다. 놈이 들어오면, 칼을 먼저 친다. 조선도는 일본도보다 약하다. 놈의 칼을 벤 후, 손목을 벤다. 단단하게 조선도를 쥔 놈의 손을 바라본다. 일본도를 쥔 내 손과 다르지 않다. 갑자기 칼을 쥔 내 손이 새삼스럽다. 조선에 오기 전 까지 나는 칼을 손에 쥔 적이 없었다.

 

누이 때문이었다. 내가 칼을 쥐게 된 건. 몇 해째 가뭄이었다. 아버지는 누이를 늙은 영주에게 팔아버리려 했다. 누이를 데려가던 인부를 죽도록 팼다. 막부에서는 조선 출정에 자원하면 죄를 사한다 했다. 조선에 가서 공을 세워 무사가 되리라 마음먹었다. 누이를 번듯한 곳에 시집보내고 싶었다. 조선에 온 지 두 해가 지나 같은 마을 친구인 마사키를 우연히 만났다. 조선에 온 지 얼마 안됐다 했다. 그리고 누이는 두달 전 그 늙은 영주의 첩이 되었다 했다. 그 후로 누이를 생각하면 눈 앞이 흐려졌다.

 

갑 자기 눈 앞이 흐리다. 눈발 때문인가. 누이 생각 때문인가. 알 수 없다. 놈이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왼 쪽 어깨에 싸늘한 통증이 느껴진다. 어느 새 나는 무릎을 끓고 있다. 처연한 기분이다. 널 겨눈 칼은 내 칼이 아니다. 막부의 칼이다. 날 겨눈 칼도 너의 칼이 아니다. 너희 왕의 칼이다. 슬프지 않은가. 내가 왜 이 곳 까지 와 고작 너희의 흰 밥그릇을 탐해야 하는가. 너는 왜 살생을 해 가면서 내 코를 베어야 하는가.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

 

놈이 쓰러진 나에게 서서히 다가온다. 놈은 내 코를 베어갈 것이다. 눈 앞이 흐리다 못해 하얘진다. 눈발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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