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평

 

[학교 레포트 제출을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글 중간 중간에 도가니 법가니 하는 얘기들이 나오지만, 나도 잘 모르고 쓴 거니까 거기에 대해선 태클 걸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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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아무런 속박이 없는 자연상태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혼란으로부터 규율되고 그것을 제도화한 상태가 인간을 진정 자유롭게 하는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일단 인간이 속박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누구든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원하는 것을 즐기며 살고 싶어한다. 여기까진 좋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타인이 자신이 될 수도 있다. 이쯤 되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을 철학적 질문 하나가 제기된다. 인간의 본성은 과연 선한가? 악한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그의 걸작 <시계태엽 오랜지(A Clockwork Orange, 1971)>를 통해 이 어려운 질문에 섣불리 답하려 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어설픈 답을 내리는 대신, 한 발짝 떨어져 불완전한 인간을 규제하는 문제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여기에도 섣불리 답을 내려 하지 않는다. 공백은 공백 대로 남겨둔 채 강렬한 질문만을 던질 뿐이다. 영화의 초반에 알렉스가 저지르는 악행을 통해 자연상태가 보여주는 혼란의 극치를 보여주고, 루도비코 법으로 알렉스를 교화(?)시키는 부분을 통해 폭력을 담보로 한 법가적 규율의 극한을 보여준다. 영화는 양 극단을 오가며 관객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강렬한 방식으로 던진다.

 

 

노는 아이 알렉스(Alex)

영화의 주인공은 ‘양아치’ 알렉스다. 정식 이름은 Alexander the Large. 황제에게나 붙일 법한 이름이다. Alex는 과거 정복자였던 알렉산더 대왕을 의미하는 것 같다. 감독은 일단 알렉스에게 왕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Alex라는 이름을 다른 방법으로 풀이해 볼 수도 있다. 이는 A + Lex로 분해될 수 있는데, 그리스어로 A는 부정을 의미하는 접두어이고, lex는 잘 알려진 바 대로 ‘법’을 의미한다.[1] 이것은 알렉스가 법을 무시하는 자라는 것을 상징한다. 재미있게도 Alex라는 이름에 담긴 두 의미 즉, ‘왕’과 ‘법을 무시하는 자’라는 두 의미는 서로 통한다. 왕이야 말로, 그가 만든 법의 질서 위에 군림하며,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자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알렉스는 법을 완전히 무시한다. 법보다 강제성이 적은 규율체계인 도덕성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는 여자처럼 긴 속눈썹을 붙인 알렉스의 눈을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한 씬으로 시작한다. 그의 오른쪽 눈에는 속눈썹이 붙어 있지만, 왼쪽 눈은 그렇지 않다. 큐브릭 감독은 이 설정을 통해 알렉스 안에 양성이 혼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알렉스가 영화에서 여성적 성향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수 많은 폭력행위와 공격적인 성향은 얼핏 보기에 극단적 남성주의의 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큐브릭 감독이 알렉스를 통해 남성성을 표현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알렉스는 차라리 남성과 여성으로 분화되기 전인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 가깝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곧 ‘문명에 길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렉스는 문명이 제시하는 재물이나 권력이라는 통속적인 위계의 기준을 거부한다. 그의 동료들이 더 많은 재물을 원할 때 그는 완전한 혼란만을 원할 뿐이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동료들로부터 배신당하는 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부유해 보이는 작가의 집에 침입해 폭력과 강간을 행할 때에도 그 집의 재물은 손에 대지도 않는다.

그는 ‘코로바 밀크바’라는 곳에서 환각제가 든 우유를 즐겨 마신다.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항상 이곳을 들린다. 여기서 우유는 그가 정신적으로 어른이 되지 못한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알렉스와 동료들이 입고 있는 복장 역시 흥미롭다. 그들은 하얀 내복차림으로 돌아다니며, 마치 기저귀처럼 생긴 낭심 보호대를 차고 다닌다. 이러한 복장 설정 역시 알렉스의 유아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아이는 선한 존재인가? 흔히 사람들은 이 물음에 쉽게 긍정하곤 한다. 그러나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를 상상해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난 학기에 의학 특강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하루는 한 소아과 의사가 유아의 성장 과정에 대해 강의했다. 그는 유아가 부모를 향해 웃거나, 치대는 행위는 학습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우호적이고 선해 ‘보이는’ 행동들이 인간의 유전적인 특질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할 때 부모가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므로 계산적으로 우호적인 행위를 익히고 점차 체화한다는 것이 그 의사의 설명이었다.

내 생각에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너 다섯 살 바기 어린아이들을 한 공간에 가두어 놓고 어른이 지도하지 않으면, 난장판이 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2] 아무튼 내 생각과는 별개로, 큐브릭 감독이 성악설을 전제로 이 영화를 연출했다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단, 알렉스가 본성 깊숙한 곳까지 악한 자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알렉스는 혼란만을 원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영락없는 아이다. 법이나 도덕은 그에게 관심 밖의 것이다. 그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어떤 절망과 아픔을 겪던 그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놀 때 그것은 곧 폭력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 따라서 알렉스는 어리기에 악한 존재이고, 악하기에 어린 존재다.

혼란만이 지배하는 알렉스의 왕국은 자연상태를 상징한다. 자연은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성인 역시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풀강아지로 여긴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구나! 비어 있지만 쭈그러들지 않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많이 나오는구나. 말이 많으면 빨리 끝나게 되니 가운데를 지키느니만 못하다.” 도덕성이 배제된 자연상태를 긍정하는 노자의 말이다. 노자는 폭력이나 도덕으로 사람을 섣불리 규율하려 하면 얼마 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규율이 배제되고 완전한 자연상태만이 존재할 때 폭력자(알렉스)의 존재는 어찌할 것인가? 그로부터 어떻게 선량한 타인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루도비코 법 – 법가적 규제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알렉스는 동료들의 배신으로 감옥에 가게 된다. 그리고 2년간 일반적인 교화 과정을 가지게 되는데, 이때 교도소의 목사와 가까워진다. 목사는 알렉스를 교화시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알렉스는 성경을 읽을 때에도 어떻게든 야한 구절만 찾아 내 성적 유희를 상상할 뿐이다.

알렉스를 교화시키려는 목사와는 달리, 교도관은 응보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외치는 그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알렉스는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죄를 그대로 갚아야 하는 처벌의 대상이다. 교도관의 사고방식은 법가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법가에서는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어긴 자에겐 응보적 형벌을 가한다. 이 제재를 통해 일반인들을 위하할 수 있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사의 교화적 관점도, 교도관의 응보적 관점도 알렉스를 갱생시키진 못한다.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어서 나가고자 ‘루도비코 법’의 실험 대상이 될 것을 자처한다. 루도비코법은 범죄자에게 일종의 세뇌교육을 받게 하여 악행을 할 경우 신체적 고통을 느끼게 만드는 치료를 통해 행형을 대신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는 법이다.

알렉스는 약물을 투여 받고 실험실에서 폭력과 범죄행위가 담긴 영상을 본다. 알렉스는 처음엔 그 영상들을 즐기지만 약물의 효과 때문인지 곧 이어 그 영상들을 참을 수 없게 된다. 눈을 강제로 감을 수 없게 만드는 장치 때문에 눈을 감고 싶어도 감을 수 없다. 며칠간의 고통스런 실험이 끝난 후 박사는 정부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실험의 결과를 검증한다. 검증은 성공적이었다. 알렉스는 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한 남자에게 예전처럼 폭력으로 맞대응 하지 못하고 온순하게 그의 구둣발을 핥는다. 이어 나타난 반라의 여성에게도 예전과 같은 성폭력행위를 가하지 못한다. 알렉스는 그녀의 가슴을 만지려고 하지만 이어 극심하게 찾아온 고통 때문에 이내 포기하게 된다.

이 시퀀스의 마지막에 나오는 목사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선택의 문제는요? 이 소년에게 실제로 선택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불의의 순간, 살고 싶은 마음에 육체적 고통의 두려움이 그로 하여금 비굴하게 짝이 없는 은신을 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치료의 위선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또한, 그는 더 이상 도덕적 선택의 능력이 없는 생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목사의 물음은 선과 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알렉스는 이제 악행을 저지를 수 없다. 저지르지 않는 게 아니라 저지를 수 없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유의지 자체가 없을 때 그의 행동을 ‘선행’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이것은 법가적 규율에 대한 중요한 비판점 하나를 제공한다. 법가는 법 뒤에 숨어있는 폭력을 통해 사람들을 위하하여 사회 질서를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이 통제에 따라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목사에 이어 정부 관계자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목사, 이것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요. 우리는 더 높은 윤리적인 입장에서의 동기엔 관심 없소. 우리가 관심있는 것은 어떻게 하여 범죄율을 떨어뜨릴까 하는 점이오!” 우리는 법가적 입장을 대변하는 이 대사에서 법가적 규율 방식의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의 선택에 따라 행동한 것일 때 어떤 방식으로든 의미가 있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자유의지가 부정된다면 인간성은 상실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법가에서 볼 때 개개인이 가진 자유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사회의 안정만이 중요한 것이다. 개인이 사회를 위해 존재하는가? 혹은 사회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가? 법가는 두 번째 물음에 긍정한다. 이는 개인의 인성을 무시하고 사회의 규율만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다.

루도비코 법은 법가적 규율의 극단에 있는 법이다. 법가에서는 법을 어기는 자에겐 폭력을 행사한다. 루도비코 법은 따로 폭력을 쓸 필요도 없다. 수형자의 몸 안에서 알아서 고통을 느끼도록 만든다. 세뇌에 의해 국가의 폭력을 수형자의 몸 안에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법가적 규율일 것이다. 어쩌면 루도비코 법에 의해 규율되는 세상은 한비자가 꿈꾸었던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주의와 맞닿아 있다. 인류가 겪어온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전체주의는 배격되어야 마땅하다. 전체주의가 인류에게 거대한 폭력적 야만이었던 것처럼, 루도비코 법 역시 야만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것은 알렉스가 저지른 악행들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야만이다.

 

 

돌아온 알렉스

루도비코 법에 따른 치료를 끝낸 알렉스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온 집에 자신이 있을 곳은 없다. 길거리를 배회하던 알렉스는 예전에 함께 흰 내복을 입고 나쁜 짓을 하던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경찰이 되어 있었고 알렉스에게 린치는 가한다.

두 동료와 알렉스가 만나는 씬을 자세히 보면 두 동료의 경찰 번호가 665와 667인 것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알렉스를 양 옆에서 붙잡고 폭행하기 위해 어디론가 데려가는데, 큐브릭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알렉스에게 666이라는 상징을 부여한다. 성서의 요한 계시록에 따르면 세상의 종말에 나타날 짐승의 수를 의미한다. 여기서 짐승은 악마에 의해 설득 당해 짐승의 표식을 받은 자를 뜻한다. 큐브릭 감독은 이 설정 씬을 통해, 루도비코 법에 따라 받은 법가적 처벌이 알렉스의 악한 성품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폭행을 당한 알렉스는 비 오는 밤길을 헤매다 과거에 자신이 폭행하고 아내를 성폭행했던 작가의 집으로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작가는 처음엔 알렉스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Singing in the Rain) 듣고 이내 알아차리게 된다. 작가는 전체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을 모아 알렉스를 ‘치료’하려 시도한다.

그들은 알렉스를 치료하기 위해 원래는 즐겨 들었지만, 정부의 실험에 의한 부작용으로 인해 싫어하게 된 베토벤의 9번 합창 교향곡을 계속해서 들려준다. 참다 못한 알렉스는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이 씨퀀스에서 작가는 고통스러워 하는 알렉스가 있는 방의 아래층에 있는데, 위쪽을 바라보면서 희열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알렉스는 병원에서 자신을 루도비커 법의 실험 대상으로 삼았던 정부 관계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알렉스에게 타협안을 제시한다. 루도비커 법의 실패를 은폐하는 대신, 알렉스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작가를 격리시키고, 알렉스의 신변과 생활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특히, 여기서 정부 관계자는 알렉스에게 “너는 너가 관심있는 분야의 직장을 얻을 것” 이라고 말한다. 아마 정부에서는 알렉스에게 그의 폭력적 성향을 합법적으로, 즉 국가의 폭력 이라는 틀 내에서 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알렉스와 정부는 각각 무정부주의적인 자연상태에서의 폭력과, 완전하게 규율된 법가적 폭력을 상징한다. 그런데 결국 이 둘은 손을 잡는다. 흔히들 극과 극은 통한다고들 이야기 한다. 알렉스와 정부의 관계야 말로 그 훌륭한 본보기(?)가 아닐까?

 

 

나오며…

영화의 마지막에 알렉스는 “I was cured all right.”이라고 독백한다. 그의 눈빛은 어느 새 예전의 순진한 듯 거침없는 눈빛으로 돌아와 있다. 그러나 예전과 한 가지 다른 게 있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알렉스는 상류층 사람들이 지켜보며 박수치는 가운데 젊은 여자와 질펀한 섹스를 나눈다, 이 씬은 알렉스의 상상이지만, 앞으로의 그의 삶이 어떤 것일지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전의 알렉스가 기득권의 안전에 해를 가하는 존재였다면, 이제 국가의 보호를 받게 된 알렉스는 아마도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기득권이 원하는 대로, 또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그의 천진한 야수성을 드러낼 것이다. 알렉스는 치료되었다. 예전의 폭력성을 되찾았으므로.

규율되지 않은 자연상태는 선량한 개인을 야만적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선택 능력을 무시하고 오로지 또 다른 폭력만으로 사회를 규제하려 한다면 그 해악은 자연상태보다 더 클 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큐브릭 감독은 여기에 대한 답을 내리지는 않는다. 단지 이 잔인한 우화를 통해 양 극단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경고할 뿐이다. 그 다음은, 우리의 몫이다.


[1] http://gauss.tistory.com/8 “시계 태엽 오렌지”

[2] 나는 유교적 분위기가 강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절이 되면 8촌까지 종갓집에 모이곤 하는데, 한 5년 전 즈음에 유치원 또래의 어린 조카들이 정말 많았던 적이 있다. 이 당시 명절에 이런 경험을 실재로 많이 겪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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