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칠판에 쓰여진 단 한 문장을 뜷어지게 바라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방송사 입사를 위한 작문 시험. 칠판에 쓰여진 단 한 문장만이 글쓰기의 단초다. 도대체 무슨 내용으로 천 이백자를 채워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어떻게든 지난 1년간 내가 공부한 것들을 지면 위에 쏟아내야 한다. 방송사 지원자를 위한 길잡이 책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논술은 이성적 자아가 글을 쓰는 것이고, 작문은 감성적 자아가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시험장의 딱딱한 의자 위에 앉아있는 나의 머리는 이성적 자아도 감성적 자아도 아닌 혼돈적 자아만 자꾸 불러올 뿐이다. 쓰긴 써야한다. 그러나 쓸 수가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심호흡을 해본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난감한 경우가 처음은 아니다. 아직 인생의 반의 반밖에 살지 않았지만, 이런 경우는 수도 없이 겪어왔다. 아니, 어쩌면 항상 아무 것도 쓸 수 없는 원고지 앞에서 고민하듯 하루 하루를 살아온 것 같다. 주위에는 20대라는 이름의 원고지를 재빨리 채워나가는 녀석들이 가끔 보였다. 그들은 항상 앞서 나갔다. 대기만성이라는 말로 위안을 삼았지만, 내가 ‘대기’인지엔 확신이 서질 않았고 ‘만성’의 시기는 절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 가지 궁색한 위안이 되었던 것은 치고 나가는 녀석들은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인생이라는 원고지를 어떻게든 채우려고 매일 매일 아귀다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런데 빠릿빠릿한 녀석들이건 아귀다툼하는 녀석들이건 원고지에 쓰는 내용은 똑같다. 서론은 대입이다. 인서울이면 좋고, 스카이면 더 좋다. 요즘엔 그 위에 아이비도 있다. 본론은 학점이다. 높으면 높을 수록 좋다. B 이하가 뜨면 재수강이다. 인용문으로 동아리를 추가할 수도 있다. 단, 영어동아리나, 경영동아리같은 취업 경쟁력이 인정된 동아리에 한한다. 천편일률적인 서론과 본론에 비해, 결론은 그나마 몇가지 선택지가 있다. 취업을 하거나, 고시를 본다. 그나마 주어진 선택권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얼마나 빨리 쓰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내용은 이미 주어져 있다. 열심히 써 보지만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쓰다 보면, 어느새 나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가 좇고 있는 공허한 욕망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 인생의 나머지 사 분의 삼을 좌우할 원고지는 그렇게 쓰여진다.

 

다시 원고지를 바라본다. 힘든 아귀다툼이 될 것 같다. 인생이라는 원고지에서도, 시험장의 원고지에서도 나는 몰리고만 있다. 이제 내 이야기를 써야할 때인 것 같다. 찌질한 개인 고백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남의 생각이 아닌 나의 생각을 쓰겠다는 말이다. 좀 설익더라도, 시간이 없어 다 못 쓰는 한이 있더라도, 이제부터는 내 얘기를 좀 해야겠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주제가 잡힌다. 그간 공부해온 작문 요령 따위는 잊어버리자.

 

크게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내 인생의 첫 문장을 쓴다.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해졌다………..’

숭례문, 벚꽃, 사진기, 초컬릿, 커피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벚꽃 축제가 열린다. 시민들은 한 손에는 사진기를, 한 손에는 소중한 사람의 손을 잡고 벚꽃이 피어있는 거리로 나와 봄을 만끽한다. 벚꽃은 봄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봄의 시작이 끝나기 전에 떨어진다. 다른 꽃들이 피어있는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가깝다. 그래서 벚꽃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벚꽃이 피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의 아름다움이 오래 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더욱 간절히 그 연분홍 빛깔을 즐기려고 한다.

 

찰 나의 아름다움. 벚꽃은 따스한 봄에 피지만, 그 이미지는 한여름 만큼이나 강렬하다. 벚꽃을 친숙하게 여기는 일본인들도 이러한 벚꽃의 강렬한 이미지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의 문학작품에서 벚꽃은 일순간 타올랐다 사그라드는 불꽃에 자주 비유된다. 벚꽃의 빛깔은 샛발간 불꽃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것의 찰나적 속성이 벚꽃을 강렬한 불꽃으로 묘사되게 하는 것이다. 일년 중 단 한번, 짧은 시간 피었다 지는 벚꽃의 비일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에 ‘불꽃’ 보다 더 적절한 낱말은 없는 듯 싶다.

 

이렇게 우리가 느끼는 여러 감정들은 ‘한정된 시간 혹은 기회’라는 조건 떄문에 더 특별해진다. 바쁜 일상의 틈새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발렌타인 데이에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선물받은 한 조각 초컬릿. 비 일상성이 경험을 더욱 가치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공고한 일상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미세한 균열을 일으킬 때,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것이 사랑이건, 아름다움이건, 감동이건. 그리고 가끔은, 고통스런 교훈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지금까지 우리 곁을 지켜온 시간 만큼이나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숭례문은 ‘방화’라는 비일상적 사건으로 인해 그 일상성을 마감하였다. 뷸꽃이 숭례문을 삼켜버린 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뱉어냈다. 전 시장의 섣부른 개방. 현 시장의 안이한 경비.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무능. 방화범에 대한 분노.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우리 자신의 문화재 의식은 과연 어땠는가 하는 점이었다. 빵만을 위해 내달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문화재의 안전 따위를 걱정할 여유는 찾기 힘들어 보인다. 과연 우리 시민들은 정부의 무능에 모든 책임을 떠넘길 자격이 있는 것일까?

 

벌써 각계에서는 전국의 문화재에 대한 안전 대책을 강구하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물론 안전 대책은 문화재를 지키는 마지노선이라는 점에서 꼭 확보되어야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시민 사회 전반에서 문화재를 아끼고 우리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의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숭례문을 삼킨 불꽃이 주는 교훈이다. 안전 대책을 수행하는 공무원도 결국 시민의 일원이며, 문화재 곁을 지나가는 수 많은 사람들도 시민이다. 시민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그 아무리 강한 안전대책이 세워진다고 하더라도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이제 우리는 숭례문 없는 일상을 살아가야 한다. 숭례문을 집어삼킨 불꽃은 숭례문 역사 500년에 강렬한(?)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강렬한 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교훈도 남겼다. 불꽃은 숭례문을 벚꽃으로 만들었다.